[혜문] 혜문의 칼 이야기2-지금은 사라진 구국의 칼 -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

  • 등록일:201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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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의 칼 이야기2-지금은 사라진 구국의 칼 -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사용한 칼 쌍룡섬(조선미술대관, 1910)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학교 운동장의 어느 구석에서는 계집아이들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돋우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고, 장난꾸러기 짖궃은 사내녀석들은 여자아이들을 골탕 먹인다며 고무줄을 끊고 도망다녔다.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그냥 일상의 하루로 남은 유년의 기억 한구석에서 조차 이순신이 남아 있다.

나는 어릴 적의 한때를 충남 온양에서 보냈다. 병악했던 어머니는 친정식구들이 살고 있는 온양에서 요양을 하곤 했는데, 어린 나도 어머니를 따라 온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료할 때면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현충사에 나들이 가서 연못에서 뛰노는 비단잉어를 보면서 한없이 즐거워 하곤 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수루에 홀로 앉아'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도 현충사 경내에서 엄마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따라 하며 외웠다.

그때 현충사 유물전시관에 진열된 '이순신 장군의 칼'(197cm)을 보고, 한눈에도 너무 커 보이는 칼에 압도된 나는 물었다.

 

"엄마 이렇게 큰 칼을 썼어? 이순신 장군은 키가 되게 컸나봐?"

"옛날 사람들은 키가 컸단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힘도 아주 세었단다"

"아 그렇구나! 이순신 장군은 천하장사였구나"

 

이순신 장군의 칼은 한산섬에서 우국의 시름에 잠긴 이순신의 이미지와 겹친다. 그런데 최근 나는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사용한 칼은 현충사의 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충사의 칼은 의전용 칼에 불과하고, 장군이 실제로 사용한 칼은 '쌍룡검'이라 불리웠던 칼이라 한다.

 

보물326호 충무공 장검(아산 현충사 소장)

보물440호 통영 충렬사 팔사품, 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뛰어난 무공이 전해지자 명나라 임금이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내린 8종류의 유물 15점이다.

 

2.

현재 이순신 장군의 칼은 충남 아산 현충사에 2자루(보물 326호), 통영 충렬사에 4자루(보물 440호-통영 충렬사 팔사품, 귀도 2자루, 참도 2자루)등 총 6자루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칼들은 모두 의전용, 지휘용으로 실전에서 사용되었던 칼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서 사용했던 칼, "쌍룡섬'은 1910년까지 조선왕실의 궁내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1910년 간행된 '조선미술대전'에 이순신 장군의 칼이란 이름으로 사진까지 기재되어 있다.

쌍룡검에 대한 이야기는 박종경의 <돈암집>에도 기록되어 있다. 박종경의 시문집 10권 6책, 필사본, 규장각 도서, 1825년(순조 25)에 아들 박기수(朴岐壽)가 엮었다. 권1에는 (賦) 1편과 시 104수, 권2~4에는 소(疏: 임금에게 올리는 글) 70편이 실려 있다. 권5에는 계(啓: 윗사람에게 올리는 글) 69편과 강의(講義) 35편, 권6에는 서(書) 39편과 서(序) 56편, 기(記: 주로 사적이나 풍경 따위를 서사적인 문체로 적은 글) 1편, 그리고 발(跋: 본문 내용의 줄거리나 간행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히 적은 글)·잡저 각 1편이 실려 있다. 권6의 <원융검기(元戎劍記)>라는 글에서는 지은이가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이순신(李蕣臣)이 쓰던 칼을 심상규(沈象奎)로부터 얻은 기록이 있다.

 

병부상서 심두실 공이 나에게 검 한 자루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검은 이충무공이 패용하던 것이요. 내가 간직한 지 오래되었으나 나는 서생이라 쓸 데가 없으니, 상장군이 된 자에게나 어울리겠소."라 하였다. 나는 그 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절하고, 그것을 뽑아보니 길이가 1장 남짓이었고, 아득하기가 끝이 없었다. 참으로 좋은 검이었는데, 칼등에 시가 있었다.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 충성스런 의분은 고금에 같도다.

내는 놀라서, "또 한 자루가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구하여 합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십수일이 지나서, 홀연히 검을 지니고 들어와서 고하는 자가 말하길, 신기하게도 이것을 샀습니다. 장군이 지니고 계시면서 아끼시는 검과 어찌 그리 꼭 같단 말입니까?라 하였다. 내가 심공이 준 검과 비교해보니 벽에 걸어놓은 것과 꼭 같았다. 잠자코 한동안 있다가 비로소 검의 출처를 물었더니, 아산현에서 차고 온 자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말하길, "믿을 만하다. 지난번 심공의 말이 지금도 어긋나지 않으니, 또 검 한 자루를 얻었구나."라 했다.  ...(중략)... 신미년(1811년, 순조11) 10월 하순에 그 시말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노라.

박종경, <돈암집> 6권의 <원융검기>에서

 

그 뒤 이 칼은 조선군부에서 중요한 물건으로 보고나해 왔다고 전해진다. 1907년경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뒤, 조선 군부로부터 이 칼을 빼앗았고 궁내부 박물관에 소장시켰던 듯 하다. 다행히도 1910년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에 수록되어 실물의 형상을 지금까지 전하게 되었다.

 

3.

세상에 어떤 나라이든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신물(信物)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물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그 어떤 것이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옥새가 없는 왕, 반지가 없는 신부, 붓이 없는 선비처럼 신물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기가 죽는다. 그것은 정상적이지 ㅇ낳은 상태임을 반증한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1984년 이종학이란 서지학자가 발견해 내기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한 그 칼은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멀어져 가버리고 말았다.

이순신의 쌍룡검은 단순한 무인(武人)의 칼이 아니다. 이 칼은 일본의 무력앞에 노예로 전락해가는 민족을 건진 칼이고, 수많은 인명을 살려낸 '활인검(活人劍)'이요, 한 시대와 민족에게 나아갈 길을 밝혔던 '대장군의 칼'이다. 지금의 우리는 아마도 이 칼에서 나왔다 해도 과장이 나리 것이다. 슬프게도 이 칼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모습만을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린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왔던 것인가?

 

이순신 장군의 칼을 바라보는 모습

이순신 장군의 칼 세부 모습

 

최근 30년의 세월을 지나 현충사에 가 보았다. 어릴 떄의 모습에서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큰칼도 있고, 비단 잉어들도 있었다. 다만 몸이 아팠던 젊은 엄마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내가 벌써 그때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서 분향하면서 '잃어버린 쌍룡검을 찾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쌍룡검을 언젠가 찾아내겠다고 이순신 장군과 마음으로 약속했다. 그건 내 어린시절 가장 존경했던 인물에 대한 보답,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과 만나는 아주 행복한 일이었다. 그 '가슴벅찬 설레임'으로 나는 '이순신의 쌍룡검'을 찾아가고 있다. 그 길은 유년의 추억, 어머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진리를 찾는 구도의 길과 맞닿아 있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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