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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칼럼
[혜문] 혜문의 칼 이야기1-동학군 장군의 칼
- 등록일:2016-07-07
- 조회수:7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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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동학군 장군의 칼
2014년6월9일. 육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방문했다.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칼 한자루에 대한 특별열람 신청이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영접한 박물관 부관장님은 19세기말 민간에서 제작되었거나 혹은 일본도의 변형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조선검보다는 그다지 가치가 높은 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2009년 박물관에서 구입할 때에도, 수천만원 이상으로 거래되는 다른 조선시대 칼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입수했다고 했다. 칼 자체로서의 가치보다는 칼이 지닌 역사성과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생각에 소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바로 이 칼입니다. 직접 한번 살펴 보셔도 좋습니다"
칼을 넘겨 받는 순간부터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한 전율을 느꼈다. 나무위에 종이를 발라 만든 칼집에는 먹으로 글자들이 쓰여있었다. 나무위에 종이를 여러번 발라 칼집을 만들었다는 것은 조선 정부에서 만든 칼이 아니라 민간에서 제잗괸 것에 대한 확정적 증거 였으며, 그위에 희미해진 글자들은 칼의 주인들이 땀흘리며 움켜 줘었던 시간 만큼의 흔적과 10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었다. 글자를 읽어 가면서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칼집에 새겨진 글귀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최고 지도부에 있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칼이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칼자루와 코등이(칼과 칼자루 사이에 있는 둥근 부분)에는 금으로 일심(一心)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신들의 맹세를 다짐하기 위해 금으로 새겨 넣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역사 시간에 배웠던 그분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엄숙하고 경건한 기운들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1894년 전봉준 혹은 그분과 함께 봉기했던 누군가가 이 칼 앞에 모여 자신들의 맹세를 써 내려갔던 바로 그 칼이었다.
나무 위에 종이를 여러번 바른 칼집을 살펴보는 모습. 칼집에 1894년 동학혁명 당시의 지도부들의 맹세가 먹으로 쓰여 있다.
"북두칠성님에게 비옵니다. 악을 징벌하고 선함을 떨치고자 발원합니다. 한울님께서 굽어 살피소서.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맹세하나이다.(北斗如來 法前 伐惡 揚善 以安天下 玉皇上帝 下監 誓願 輔國安民 廣濟蒼生)"
조심스레 칼집에서 뽑아든 칼날이 뿜어내는 검기는 둔중했다. 칼날 길이는 46cm로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 쓰였던 다른 의병대장의 칼날보다는 긴 편이었다. 맹세를 위해 쓰인 의전용 예도(禮刀)이거나 단순히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도(指揮刀)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실전에서 직접 사용하기도 했을 크기였다. 이 칼이 실전에서 쓰였다는 점은 군데군데 칼을 사용했던 격검흔(擊劍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칼을 실전에 사용하게 되면 칼과 칼이 부딪히면서 칼날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이를 격검흔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한다면 칼날의 이가 빠진 모습이 생각하면 클리지 ㅇ낳을 듯하다. 만약 칼날에 격검흔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의전용 칼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었던 칼이었다는 것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1백여년의 세월을 견디며 잿빛으로 녹슨 칼날은 둔중한 검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잘만들어진 칼날이 주는 예리한 서슬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람들의 맹세와 정신이 실려 뿜어내는 깊은 무게감이었다.
칼날의 검기를 확인하는 모습. 100년 세월을 넘어 둔중한 검기를 발산하고 있다.
"육군사고나학교 박물관에는 다른 좋은 칼도 많습니다. 하필 이 칼을 보시고자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음. 글쎄요. 제 눈에는 천하제일검으로 보이는데요?"
긴장된 정적을 뚫고 박물관 부관장님의 질문에 문득 선문답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다른 장군들이나 무관들이 사용한 좋은 칼에 비하면 역시 이 칼은 민간에서 제작한 칼이므로 기법상 화려해 보이거나 예리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안목으로는 동학군 장군의 냄새 그대로를 증언하는 훌륭한 칼로 느껴지고 있었다. 칼을 만지고 있다보니 전봉준 장군의 생가의 모습이 칼날 위로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전라북도 고부에 위치한 전봉준 생가는 말 그대로 초가삼간의 수수한 조선시대 민초의 살림집이었다. 1894년 이전까지 전봉준은 이곳에서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평범한 서당 훈장이자 동학접주였다고 알려 졌다. 별다를 것 없는 그를 세상으로 이끈 것은 "부패한 조선의 현실"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사상이었다. 그는 하늘을 능멸하는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들과 부패한 정부를 향해 정의의 칼을 뽑아 들었고, 그를 따르는 20만의 사람들과 함께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호남을 접수했다. 불과 수개월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가 설치한 집장소를 통해 호남지역에서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차별이 철폐되고, 탐관오리를 징벌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새로운 세상이 그에 의해 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칼을 잘 쓰는 사람을 옛날에는 천하제일검이라고 불렀다. 칼이란 무엇인가를 베는 것이고, 칼을 잘 수련할 수록 무엇인가를 더욱 잘 벨 수 있게된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칼을 연마해서 천하제일검이 되었다면 무엇을 베어야 하는가? 천하제일검이 겨누어야 할 것은 그 시대가 직면한 세상의 못누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과 부패한 권력을 베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젖히는 칼. 그 천하제일검의 자취를 우리 역사에서 찾아 본다면 1894년 전봉준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모습은 아니었을까?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군에 위치한 전봉준 고택
일본군의 진압으로 군사를 잃은 뒤, 서울로 압송되어 온 전봉준의 모습은 한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역적의 죄명을 뒤집어 쓰고 사형을 언도 받고 나오는 모습을 일본인 사진사가 찍은 것 이라고 한다. 그 사진은 부패한 세상을 뒤집고 새 세상을 열어 젖히는 혁명가란 황금빛으로 빛나는 투구에 백마를 타고 오는 위엄 넘치는 장군이 아니라 맨상투머리에 흰저고리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걸 증언해 준다. 그 사진의 전봉준과 전봉준 고택의 초가지붕, 육군 박물관의 수수한 동학 장군의 칼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난지 120년. 그간의 짧지 않은 세월동안 어딘가에 머리카락 보일세라 꼭꼭숨어 있다가 우연히 다시 돌아온 갑오년의 봄. 내 눈에 우연히 들어온 동학장군의 칼이 마냥 내게는 신비롭고 위대해 보이기만 하다.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가 남원의 어느 사찰 은적암에 숨어 들어 세상에 전했다는 검결 한수가 마음에 와 닿는다. 동한군 장군의 칼이 세상에 나타는 것은 최제우가 꿈꾸고 전봉준이 펼치고자 했던 세상이 다시금 구현 되려고 하는 것일까?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래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 아니 쓰고 무엇하리
최제우, 검결 중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사진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